紅(Kurenai) - '오월의비'가 내리면 사랑이 싹튼다

ANIMATION 2008. 6. 13. 00:39


예전부터 일본엔 믿기 어려운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많다고 한다. '세상이 가르쳐준 비밀'같은 만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일본 민간 전설 중엔 '여우'나 '뱀'에 관한 이야기도 종종 있다. 여우에게 장가든 인간이 평생 여우를 따라 해로했다던지 그 여우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던지 집안의 수호신을 모신 '숨겨둔 곳'이 유서깊은 집안엔 반드시 있다던지 등 신비로운 존재와 인간의 결합이 소개되곤 한다. '백귀야행'의 이야기 중 하나엔 '집안의 장남은 가문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장가를 간다'는 내용이 있다. 그 장남의 대를 잇는 아이를 낳는 건 부인으로 부를 수 없는 별채의 다른 여인이지만 공식적으로 그 장남은 '정체모를 존재'와 비밀리에 혼인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밀스런 존재들을 모신 곳은 한 나라의 '궁궐'처럼 아무나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한다. 말 그대로 '오쿠노인'이다.

이 애니 내용 중 자주 등장하는 '
오쿠노인(おくのいん)' 이란 단어의 뜻은 '절이나 신사 본당보다 안쪽에 위치하여 개산 조사(開山祖師) 영상(靈像)이나 신령을 모셔 놓은 곳, 남에게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곳 또는 큰 조직체의 겉으로 나타내지 않은 내부 세계'를 뜻한다고 한다.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출발했다는 이 애니의 일곱살짜리 여주인공 무라사키는 이 오쿠노인의 주인으로 외부에 절대 그 존재를 보여주지 않는 '쿠호인' 집안의 딸이다. 어떤 사연으로 그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단한 재력을 가진, 거의 왕족과 마찬가지의 재력을 가진 쿠호인 집안은 무라사키를 오쿠노인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무라사키의 그 운명은 어머니대로부터 이어진 숙명같은 것이다. 쿠호인 집안의 공식적인 부인으로 나설 수 없는 쿠호인 소쥬와 쿠호인 렌조가 무라사키의 어머니,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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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결혼을 올린다는 그 전설처럼 무라사키는 다른 여성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자라났다는 설정. 이 어마어마한 집안의 어린 딸은 어느 날 쿠호인 집안의 저택을 탈출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사연이나 자세한 이야기는 초반부터 설명하지 않지만, 그리고 아직도 많은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지만 조금은 특이한 7살 어린 여자아이로 또다른 주인공 쿠레나이 신쿠로와 동거하게 된다. 지저분하고 자그마, 목욕탕도 없는 냄새나는 원룸에서 함께 살게 된 두 사람. 과연 무라사키는 누구의 사주로 바깥 세상에 나왔으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외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걸까? 쿠레나이는 약간은 건방진 이 아이가 궁금하지만 '해결사'의 본분대로 그 아이를 단순히 지킨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쿠레나이 신쿠로 역시 숨겨진 사연이 많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다. 특이한 어린 시절을 겪었던 이 소년은 나름대로 평범하게 중학교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해결사'이다. 쥬자와 베니카라는 인물이 지시하는 많은 일들을 해결하고(주로 폭력이 동반되는 보디가드 일이나 협박) 그 비용으로 학교 생활과 일상생활을 해결한다. 신쿠로는 갑자기 나타난 무라사키의 세상 물정 모르는 행동 때문에 갑자기 고민이 많아진 캐릭터로 나름대로 많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에게 친절한 일년 선배 호우즈키 유우노,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자란 무라카미 긴코, 같은 맨션의 6호실에 살고 있는 무토 타마키, 4호실에 살고 있는 야미에, 무라사키의 호위 역으로 주변에서 서성이는 야요이와 베니카는 항상 이 소년을 곤란하게 만든다. 이 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7살 짜리 소녀를 만난 신쿠로는 제법 쿨하게 이 상황을 헤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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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와 신쿠로에겐 각자 숨겨진 비밀이 있고, 그 비밀과 미스터리가 애니를 이끌어가는 주요 배경이지만 의외로 13세 이상 시청 가능인 이 애니메이션의 하이라이트는 '사랑'이다. 그것도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성숙하고 아리따운 또래, 연상의 여성들이 아닌 7살짜리 꼬맹이 무라사키와의 애정 행각. 15살 짜리에겐 한없이 어리게만 보이는 무라사키를 데리고 목욕탕을 가기도 하고 스스럼없이 함께 잠이 들기도 하지만 외롭게 자라왔던 두 사람에게 서로는 진정으로 마음을 줄 수 있는 특별한 존재들이 되어버린다. 초반에 자라온 환경이 달랐던 그들이 티격태격하며 함께 살아나가는 과정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쥬니베는 대체 무라사키에게 어떤 경험을 주고 싶었던 걸까?

두 사람이 살고 있는 허름한 원룸의 이름은 '사미다레(五月雨)'라는 이름을 가진 낡은 곳이다. 낡은 여관 이름같다고 종종 놀림받는 이 일본어 이름은 원래 음력 오월에 내리는 '장마비'를 뜻한다고 하지만 어떤 의미로 새싹이 나고 풀과 꽃들이 자라나는 '5월'의 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7살 소녀와 15살 소녀가 함께 살며 사랑을 키우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무라사키의 엄마 소쥬와 아빠 렌조의 사랑은 다른 형식적인 부인을 곁에 두는 까닭에 어딘가 어긋났고 무라사키 양어머니의 질투 역시 어딘가 어긋난 사랑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앞으로 무라사키가 오쿠노인의 여인으로서 겪어야할 경험도 그 어긋남과 이어져 있는지 모른다. 애니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볼 때 사미다레는 가장 아기자기하고 소중한 사랑이 피어나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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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가드를 맡은 신쿠로는 낮시간엔 주로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동안 무라사키는 주로 옆집의 언니들과 TV를 보거나 음식을 챙겨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어떤 의미로 상당한 괴짜들인 대학생 타마키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미에는 무라사키에게 독특한 정신 세계를 전파하지만 정을 쌓아가는 가족같은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과 공개적으로 합류하진 않지만 무라사키를 지키기 위해 늘 사미다레 부근을 서성이는 야요이들이 7살을 맞은 무라사키를 위해 신사를 방문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일본은 어린아이가 3살, 5살, 7살이 되는 때를 가려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시치고산을 치르게 한다. 한번도 시치고산을 치르지 못한 무라사키를 위해 약간 쌀쌀한 겨울날 근처 신사를 방문하는 그들은 몹시 행복해 보인다.

일본 애니의 소재가 다양한 만큼 이 애니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설같은 풍습이 몇가지 등장한다. 실제 그런 일이 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설정이지만 모종의 비슷한 '민간 이야기'는 존재한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일본이란 나라를 잘 알 수 없으면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라고도 생각된다. 쿠호인 집안의 비밀, 그리고 쿠호인 집안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비밀, 신쿠로가 어릴 적 겪었던 일들이 엮여 조금은 난감한 오쿠노인 이야기를 희석해주고 있다. 어떤 로맨스와 미스터리가 남은 부분을 차지할 지 궁금한 애니메이션 중 하나이다. 그리고 왜 하필 이 이야기의 제목은 '쿠레나이'인 것일까.



출처 :
http://www.samidares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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