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ppening - 이 영화엔 반전이 없다

MOVIE 2008. 11. 9. 13:10


( 스포일러 포함합니다 )

아인슈타인은 '벌들이 사라지면 4년 내에 인간도 사라진다'는 극단적인 경고를 한 적 있다고 한다. 꿀벌은 지구의 모든 생명, 식물의 생식을 많은 부분 책임진 존재이고 그 꿀벌이 살지 못하고 번식하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도 살 수 없다는 이야기다. 최근 방영된 영국 드라마, 'Doctor Who(2005)'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지구에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벌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닥터후의 설정에서는 꿀벌들 중 일부는 외계의 존재기 때문에 직감적으로 지구의 위기를 깨닫고 우주로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쪽이든 꿀벌은 자연이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런 류의 현상은 인간의 공포를 많은 부분 자극하고 있다. 꿀벌 실종 괴현상(Colony Collapse Disorder, CCD)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관찰되고 있고 각 방송국(특히 KBS 방송국)은 이 주제를 집중 취재한 일도 있다. 이 꿀벌이 사라지는 현상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메시지라는 게 위대한 과학자의 예언이었던 만큼 많은 영화나 오락거리의 소재로 이용되었다. 

뉴욕에서 일어난 괴현상을 피해 엘리어트 무어와 그의 딸, 그리고 친구 줄리앙은 피난을 떠나게 된다.

그게 바로 이 영화 'The Happening'의 내용이다. 센트럴파크를 비롯한 뉴욕 전역에서 이유 모를 집단 자살이 시작되고 높은 공사장의 사람들은 마치 사람의 비가 내리듯 아래로 뛰어내린다. 고등학교 과학 교사인 주인공 엘리어트 무어(Mark Wahlberg)는 그 시간에 꿀벌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괴현상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벌이 실종되는 원인을 조사하는 학문 탐구의 시간은 잠시, 뉴욕의 괴현상으로 인해 부근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려지게 된다.

뉴욕의 집단 자살을 보며 사람들은 새로운 독소의 출현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몰린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은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고 사람들은 자연에서 발생했다는 독소를 피해 멀리 떠나려고 한다. 아내와 친구 그리고 친구의 딸을 데리고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는 주인공 엘리어트는 언론에서 떠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종 독소 보다는 얼마전부터 이어진 아내와의 갈등을 신경쓰고 있다. 친구와 아내, 그리고 친구의 딸을 데리고 시작한 여행. 과연 신종 독소를 피할 방법같은 것은 있을까?

알 수 없는 공포를 피해 위험이 적은 곳으로 향하는 부부.

영화의 첫부분이 이유 모를 자살과 사람들의 혼돈에 치우치고 있는 까닭에 막연한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사람들이 이유없이 자살한다는 설정은 '약간은 과장된' 영화 포스터 만큼이나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설정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 공포를 점점 더 강조하면서도 공포의 원인이나 현상을 과장되게 주목하지 않고 이 영화의 주연이 된 사람들에게 시선을 계속 옮겨간다. 지금 당장 헤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부부, 그리고 그들의 딸이 아닌 낯선 여자아이가 겪는 일들이 하나의 관점을 갖게 된다.

샤말란 감독의 전작이 '반전'을 노리는 영화들이란 평을 듣곤 하지만 'The Happening'의 내용을 반전시리즈(?)의 연장선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서 소재로 잡은 두려움, 그 공포의 원인이 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큰 공포를 느끼는 대상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편안함과 안정을 느끼는 대상이기 때문이다(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빠르게 삶을 포기해버리는 것일까). 반전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란 생각이 들 뿐이다.

주변의 모든것으로부터 공포를 느껴야하는 주인공들.

사람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드는 '미지의 공포'를 주는 것들. 평소에 거리낌없이 가까이하던 존재들 중에도 공포의 요소를 갖춘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꿀벌'이 사라졌음으로 인해 지구에 큰 재앙이 올 때에도, '핵폭탄'이 터져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인간은 똑같은 두려움을 느낄 지 모른다. '재앙이나 재난'을 다룬 이런 영화를 볼 때 집중해야할 것은 공포의 대상이나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시선을 끄는 장면은 잔잔하게 평원을 가로지르는 바람도 아니고 뉴욕 센트럴파크의 가로수들도 아니다. 혹은 집단으로 자살해버리는 광기도 아니다. 거의 남과 마찬가지인 한 부부와 친구의 딸이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며 느끼는, 고립되는 동안 서로를 의지하며 믿게 되는 그 과정에 훨씬 더 눈길이 간다. 주인공의 친구 줄리앙(John Leguizamo)이 딸을 맡기는 순간의 비장함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뉴키즈온더블럭' 도니 윌버그와 형제 간으로 알려진 마크 윌버그. 그의 영화들은 최근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재난 영화엔 많은 종류가 있고, 외계인의 침략을 다룬 영화들 역시 인류가 겪는 재앙을 다루기에 바쁘다. 헐리우드식 재앙영화의 '과장'된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연으로 인한 소규모 재앙엔 큰 점수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레밍떼의 자살같은 장면이 영화 초반에 보여지며 충격을 주긴 했지만 이 영화의 초점은 개인적으로 재앙이 아니라 인간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에 초연한 듯 밋밋하게 상대를 바라보지만 '이왕 죽을 거라면 당신과 함께 죽겠다'는 주인공 엘리어트나 친딸도 아닌 제스에게 사랑을 갖게 되는 엘마의 캐릭터가 이 영화의 볼거리 아닌가 한다.

2007년 Fox 채널에서 방영된 '틴맨(Tin Man, 2007)'에서 DG 역을 맡았던 조이 데이셔널(Zooey Deschanel)의 커다란 눈과 인조 식물을 보고 대화를 나누며 아내와 친구의 딸을 걱정하는 마크 윌버그(Mark Wahlberg)의 침착한 눈빛이 이 영화의 중심이 아닐까 싶다. 반전을 바라는 건 팬들의 기대였을 뿐, 제작자는 인간의 사랑이 재앙을 이긴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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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영화 - The Happening(2008)

The Counterfeiter - 전쟁과 생존과 죄책감의 무게

MOVIE 2008. 11. 8. 21:55


(스포일러 포함)

쓰레기가 수거되듯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은 총부리를 앞세운 군인들 앞에서 겁을 먹고 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 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서 몰매를 맞아 즉사하기도 하고 간신히 10대를 벗어났음직한 소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다니기도 한다. 벽과 철망을 사이에 두고 독일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즐길 동안 유태인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영화 풍경 속, 유태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그렇게 교육받은 독일인들 사이에서 한 유태인 남자가 배짱 좋게 음식과 담배를 받아먹으며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 영화는 그 인물의 과거를 기록하고 있다.

유태인은 수용소에서 제법 많은 수가 학살되었다고 한다. 기록을 읽어도 사례를 읽어도 독일이 유태인에게 저지른 일은 후손들 역시 고개를 들지 못할 그런 범죄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수용소에 수감된 일부 재주가 좋은 유태인들은 특별 수용소에 배치되어 살아남았다. 독일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그 수단을 완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소로비치는 여권을 비롯한 위폐를 만들어 뿌리는 일을 하다 1936년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수감됐고 미국과 영국의 위조지폐를 만드는 일의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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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위조 실력의 범죄자답게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다른 유태인들에 비해 깨끗하고 안정적인 잠자리, 나은 식사와 샤워시설도 제공받고, 일요일엔 쉴 수 있으며 동기 부여 차원에서 탁구대같은 휴게시설도 설치해줬지만,  그리고 음악도 종종 들을 수 있는 특혜, 무엇 보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지만 그곳에서 일을 처리하는 그의 삶은 그래도 위험천만했다. 그들은 생존 자체가 드라마일 수 밖에 없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유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군들의 그들에게 시킨 일은 나머지 유태인들을 모두 죽여버릴 수도 있는 그런 일이었다. 그렇지만 해내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는다.

소로비치에겐 모든 시설이 제공되었다. 인쇄기술자, 그래픽 전문가, 동판 제작가, 의사, 정밀 감정가들까지 모두 소로비치의 기술에 의지해 영국 파운드와 미국 달러를 생산할 수 있다. 개인 위조 전문가 시절엔 전혀 상상한 적 없는 그런 자원이 제공되었고 클래식 음악과 담배까지 제공되었다. 세계대전 막바지에 파산위기에 처했던 독일은 물자를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다른 수용자들이 죽어가는 총소리가 들리고 구타와 포행의 공포에 시달리는 그런 불안함은 여전했지만 수용소 내에 격리되어 사는 위폐제작팀들은 다른 유태인 보단 살 수 있을 거란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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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영국 위폐를 제작하겠다는 독일의 아이디어나 그 아이디어를 위해 이용된 유태인 소로비치와 그의 동료들은 항상 갈등에 시달리게 된다. 베른하르트 작전이라 불린 이 작전을 위해 독일군은 점점 더 위조팀을 닥달하게 되고, 소로비치는 그 정점에서 힘들어한다. 극중 주인공인 부르거는 아내와 아이들을 아우슈비츠에 남겨두고 왔고 폴리아라는 어린 아이는 결핵에 걸린 상태지만 약도 지급받지 못한다. 소로비치의 기지로 그곳의 생명은 구하더라도 안전은 보장할 수 없는 상태. 위조 지폐를 빨리 만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그 위조지폐로 전쟁이 길어지면 같은 민족의 생명을 더 빨리 단축할 수도 있다.


그의 동료 부르거는 위폐를 만드는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고 소로비치를 설득한다. 이 돈을 빨리 만들면 만들수록 독일을 돕는 셈이니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은 이미 다른 수용소에서 몇번씩 죽음의 위기를 겪고 공포를 느끼는 처지라 어서 만들어서 살아남고 싶다고 소로비치를 조른다. 이 영화는 한편의 다큐멘터리같은, 세계사에 남을 최대 위폐제작사건의 일면을 보여주면서 위기 앞에서 갈등하는 소로비치의 심리를 집중조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생명들과 눈앞에 있는 생명들 중 누굴 구할 것인가?  소로비치와 140명의 특별 관리 대상자들은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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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수용소 내 유태인들이 그랬듯 소로비치도 살아남는다. 천재적인 예술 재능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잡히지 않았다면 그저 조무래기 위조범 정도로 생을 마감했을 그가 세계 최대 위폐 위조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남자는 어떤 선택을 했고 그가 눈으로 직접 보게 된 현실이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만든 결과를 직접 보게 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끔찍한 것이다. 아무리 목숨이 위험해 저지른 일이라도 말이다. 때로 나치는 무자비한 권력의 상징으로 모든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상징성 만큼 극중의 상황은 주인공을 끊임없는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아무리 덤덤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들 '자신의 선택'은 자신이 감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 혹은 소설이라는 매체가 과거 어떤 인물의 행동을 미화하고 면죄부를 주기 위해 제작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루어진 사건일 지라도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을 그런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희대의 위조 지폐 사건'의 주인공이란 불명예도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일들이 많노라 이야기하는 추억도 본인에겐 지극히 괴롭고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살아남아 사람의 반성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미 정해진 악의 축'인 나치를 한번 더 비난하고 싶은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그저 이런 인생이 있었고 그 감회가 어땠노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한세기 전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으니 어느 누가 그 시절의 비극을 피부 깊숙히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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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한 생존자의 싸구려 회고담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회한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그가 돈을 뿌려대며 바닷가에서 춤추던 장면은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다.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스포일러랄 것도 없이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다. 모사에 뛰어난 재주가 있던 실존인물 소로비치는 어떻게든 침착하게 살아남는 생존능력이 뛰어난 남자였고 그의 친구 부르거가 이 작센하우젠 수용소 내 18, 19 구역에서 있었던 위폐 사건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 기술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살아남으면서 주변의 원망과 슬픈 사연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솔로몬 소로비치(실제 이름은 Salomon Smolianoff)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됐을까.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처럼 평생 그 각인을 잊지 않고 불행했던 건 아닐지. 오트스리아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스테판 루조비츠키 감독이 제작했고 소로비치 역은 카알 마르코빅스가 아돌프 부르거 역은 오거스트 디엘이 연기했다. 나치와 주변 이야기가 항상 수상에선 빠지지 않듯, 2008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etailStory.do?movieId=43057





Elizabeth: The Golden Age - 여왕은 인간이기 보다 조각된 신화

MOVIE 2008. 3. 2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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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로 꽤 많이 제작됐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1998년 제작된 이 영화의 전편 'Elizabeth'도 있지만 2005년 BBC에서 제작된 'The Virgin Queen'도 있고 2006년 HBO에서 방영된 'Elizabeth 1'도 있다. 여왕의 어떤 모습을 부각시키냐에 따라 같은 실존인물들이 등장함에도 이야기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연인을 부각한 내용, 권력이나 영웅으로서의 내용 등 엘리자베스는 과연 천의 얼굴을 가졌다. 연대기별로 여왕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사실적인 드라마도 있을 법 하건만 Virgin Queen이라는 소재는 상상력없이 표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매체에서 다루고 싶어하는 주요한 질문은 늘 비슷하다. 그녀는 어떻게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는가, 왜 결혼하지 않았는가, 어떤 방법으로 대영제국의 번영을 가져왔는가,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냈나, 라이벌 메리 스튜어트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등. 어떤 점을 일순위로 두는가 만 다를 뿐 항상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998년에 제작된 Elizabeth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엘리자베스가 진정 영국 여왕이 되기로 맘먹은 그녀의 초반기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면 2007년에 개봉된 영화 'Elizabeth: The Golden Age'는 여왕이 된 후 자신을 다스리며 여왕으로서 통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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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간택된(?) 엘리자베스의 연인은 기존 드라마에 비해 가장 신선해 보인다. 전쟁시기에 걸맞게 해적을 고른 것도 재밌다(꼭 필요했던 인물). 반드시 등장하다시피 했던 로버트 더들리 경이 1998년도 전작에서 처리됐다는 사실과 실제 이 인물이 엘리자베스 트토크모튼의 남편이었다는 점 때문에 로맨스는 많이 약화된 편이다. 여성으로서의 엘리자베스를 보이고 싶어하는 작품이 많지만 정치적인 이미지 유지에 능하고 거친 사냥이나 승마를 즐긴 이 대담한 여왕이 소심한 사랑을 했을 지 의문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눈치를 보며 결혼상대자를 골라야 했던 25살의 처녀여왕이 영국의 평화를 일구어내고 카톨릭 암살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며 스페인의 대공격을 물리쳤다는 이야긴 거의 신화에 가깝다. 여자 혼자 영국을 지켰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나라를 이끌어간 그 리더십과 통솔력은 세계적인 모델이 될 만하다고들 한다. 골든 에이지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려 드라마에서 자주 보여주던 군더더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여왕이 살아있는 초상화, 영웅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자베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모두 알려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1998년 영화에서 등장하던 로버트 더들리, 엘리자베스의 가장 오래된 연인으로 알려진 그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다른 드라마에서는 영화와 같은 시기에 그가 사망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다만 그녀의 총애를 받던 시녀, 엘리자베스 트로크모튼의 남편, 월터 라일리 경이 엘리자베스를 흔들어놓을 뿐이다. 두번째 엘리자베스, 애칭으로 베스라 불린 이 시녀의 아버지 니콜라스 트로크모튼은 헨리 8세의 여섯째 부인인 캐서린 파의 사촌이었는데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를 딸처럼 키워준 사람이다. 캐서린 파의 두번째 남편 토마스 세이무어(제인 세이무어의 오빠,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 왕위계승권을 항상 염려하고 있었다)가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 되기 전엔 엘리자베스는 캐서린 파와 제법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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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의복과 장식에 많은 욕심을 보인 건 사실이라고 한다. 수백개의 가발을 골라 숱이 적은 머리를 장식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로 여왕이미지를 유지했다. 공주로 살던 시절 시녀가 여기저기 구걸해 드레스를 마련했다는 이야긴 유명하다(1998년 전편에 나왔던 가정교사 Kat이 그녀를 돌봐줬다). 영국에 갖힌 아름다운 메리 스튜어트에게 입지 않는 낡은 드레스를 보내줬다던지 과감하게 신체가 비치는 드레스로 신하들을 곤란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에는 상황에 맞춰 꽤 많은 의상이 등장한다고 한다.

여왕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는 이상 예배를 비롯한 사적인 자리에 홀로 존재할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는 시녀들을 가족처럼 가까이 두곤 했다. 국가 행사에 항상 몇인의 시녀를 동반하고 시중을 들게 했는데, 사냥, 승마를 비롯한 거친 운동으로 항시 가만히 있지 않았던 이 여왕은 춤추기를 몹시 즐겼고 시녀들이 춤을 제대로 추지 못하면 직접 교정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이런 부지런함 떄문에 늘 마른 체형을 유지했단 기록이 있다.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욕구는 '국가적인' 문제가 아니니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녀는 애인을 사랑할 수 있는 젊은 '베스'를 부러워하게 된다. 실제 베스를 부러워한 건 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베스를 총애한 것 만은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탁월한 감각을 가진 여왕이지만 공식적인 애인은 없었던 엘리자베스. 그녀에 관한 여려 기록으로 누군가와 연인 사이가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사람들은 많다. 심지어 세익스피어가 그녀의 숨겨진 아들이란 소문이 있었을 정도다. 왕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결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괘씸한 발언을 거리낌없이 뱉어내는 당시 문화로 보아 미혼의 엘리자베스는 속물적인 대중의 관심사 아래에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국민의 어머니, 마리아같은 동정녀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요즘도 가상의 연인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걸로  보아 이런 류의 관점은 변하지 않나 보다(엘리자베스에 대한 여러 비난 중 창녀, 마녀같은 것들이 제법 많았다). 위대한 정치인에게 꼭 숨겨진 사랑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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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정치 감각이 탁월했다.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몸소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갔다는 건 당시 문화를 생각하면 제법 소설같은 이야기다. 포스터의 이미지대로 여왕이자 전사인 엘리자베스가 여자처럼 망설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인물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구석이 있다. 배우 케이트의 아름다움이 여왕의 위엄을 부각시키는데 적절하게 이용되었다.

영화 내용 내내 자세한 역사적 사실이 생략됐지만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동안 메리 스튜어트가 사형당하고(펠리페 2세의 계략으로 그녀를 죽인 것처럼 그렸지만 펠리페 2세를 자극할 생각으로 메리 스튜어트의 역모를 조작했다는 설도 만만치 않다 - 메리에게 악감정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정략적 이유로 죽이지 못했었다) 펠리페 2세가 대군을 몰고 영국으로 쳐들어오고 그녀는 해적을 비롯한 막강 해군을 활용하여 무적함대를 물리친다. 약간 정신병자처럼 그려진 펠리페 2세는 이 전쟁 이전에 수없이 엘리자베스를 정치적으로 협박하고 영국이 유럽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던 사람이다. 엘리자베스는 은밀히 해적을 지원했고 전설적인 영국 해군의 기틀을 마련했다. 갑옷을 입고 군인을 격려한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역사이다(물론 머리풀고 남성 갑옷을 입었을 것 같진 않지만). 드라마 보다 영화가 좋은 점은 역사적 사실을 판타지처럼 재포장할 수 있단 점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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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가 무적함대를 끌고 영국에 쳐들어온다. 영국의 앙숙 프랑스까지 연합해 영국을 압박하지만 결혼 회유책에도 끄덕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유럽의 패권을 잡았다. 커다란 지도 앞에서 침략 경로를 예상하며 힘겹게 고민하는 그녀의 운명은 유일무이한 여왕이 되는 것. 스페인은 이후 유럽에서 힘을 잃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는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 영국 왕위계승자가 됨으로서 영국에 흡수되었다.

유럽의 변두리, 영국을 대영제국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여왕, 그러나 개인적으론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외로운 여자, 엘리자베스 1세. 이 영화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그 주제이다. 그녀의 연인으로 소문난 많은 사람들이 식상했던 탓인지 새로운 실존 인물을 연인으로 부각시켰는데 덕분에 역사적 사실은 훨씬 더 많이 축소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왕위를 노린 메리 스튜어트와의 관계도 역사적인 흥미거리 중 하나인데 영화 속에서 두 여자는 전혀 만난 적이 없다. 1998년도 영화에서 앙쥬공과 스코틀랜드의 마리 드 기즈가 등장했던 것과 비슷하게 엘리자베스의 사랑에 비하면 나머지들은 조연에 불과하다(역사적으로도 조연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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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월싱엄 경의 역할이 전편에 이어 강조되고 있는데 이 인물 이외에도 엘리자베스를 받쳐준 신하들이 제법 많다(영화상 단역으로 등장하는 시녀들을 비롯해서). 수완이 탁월했던 여왕은 국민과 다른 나라에겐 아름답고 부드러운 여왕의 이미지를 추구하고 정략적으론 반대파와 측근을 조정하고 잘 활용했으며 정책면에선 과감하고 결단력 있었다. 영화 속에서 전사로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여왕에게 '연약한 여자'의 얼굴이 필요한 건 후대 사람들의 편견은 아닐까.

영화라는 매체는 사실 전달 보다는 이미지 전달을 위해 탁월한 방법이다. 그점을 꺠닫고 보면 판타지 소설처럼 흘러가는 최근 사극 영화들의 경향을 용서할 수 있을 지 모른다. 역사학자들이 엘리자베스 1세의 실제 삶을 추측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진짜 그녀의 모습은 오리무중이 되버릴 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한참 전 사망한 고인일 뿐인데 아직도 영웅, 여자, 전사가 되어 힘겹게 노력하고 있다. 그녀가 영웅이라는 사실 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영웅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 조각하고 새겨넣기 위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장 적합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있었을 지 없었을 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진정한 연인을 마음에 감추고 꿋꿋이 영국을 발전시킨 여전사, 처녀 여왕의 이미지를 각인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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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http://bina007.blogspot.com/2007/10/elizabeth-golden-age-absurdly.html
http://afashionablelife.wordpress.com/2007/10/15/elizabeth-the-golden-age/
http://www.screenrush.co.uk/
http://www.tudorplace.com.ar/Bios/WalterRaleigh(Sir).htm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nhn?code=65091
http://www.mtime.com/my/iiiforever/photo/524710
http://blog.sina.com.cn/s/blog_4ee44d6001000bd7.html
http://www.gabe-e.com/rushes/
http://blogs.knoxnews.com/knx/brown/archives/2007/10/10_days_out_12.shtml
http://michellemoran.blogspot.com/2007_08_19_archive.html

초콜릿천국 - 윌리 웡카와 초콜릿 공장

MOVIE 2007. 11. 29. 09:31


기술이 나아지면 감정과 꿈도 발전하는 걸까요?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둔, 두 영화를 비교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또는 시각적으로는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 훨씬 낫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인간의 꿈을 건드리는 능력은 과거의 영화를 따라갈 수 없는 모양입니다. (물론 자본의 탓인지 세월의 탓인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한국어 제목은 후대에 만들어진 영화가 차지했군요. 유명세 탓이겠죠)

Roald Dahl(로알드 달)의 원작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1964)'은 두 번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1971년에 만들어진 'Willy Wonka & the Chocolate Factory (한국 DVD명 : 초콜릿 천국)'와 2005년에 그 유명한 팀버튼과 조니뎁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한국 :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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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이 출간한 동화들은 맛을 잘 표현하기로 유명한데 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후속작으로 '찰리와 거대한 유리 엘리베이터(Charlie and the Great Glass Elevator, 1973)'이란 동화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초콜릿 공장 시리즈에서 나왔던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유리 엘리베이터를 따로 꺼내서 소설로 만든 거죠. 그 이외에도 '그렘린' 이라던지 '제임스와 큰 복숭아나무' 등의 동화와 소설, 단편집을 남겼습니다.

2005년에 만들어진, 젊어진 윌리 웡카, 조니 뎁 주연의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과 1971년에 만들어진, 진와일더 주연의 Willy Wonka & the Chocolate Factory는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오히려 원작 동화를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은 쪽은 조니뎁 주연의 최신 버전이 아닌가 하는데, 그것은 71년 판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는 윌리 웡카의 치과의사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초콜릿 공장을 만들게 됐고, 어째서 아무도 들이지 않고 공장 안에서 만 지내게 된 것인지를 71년판의 경우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71년판에는 초콜릿이나 과자 자체가 꿈이고 환상이고 소원이 될 수 있지만, 현대버전에서 초콜릿이 꿈이란 사실을 설명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치과 의사 아버지가 단것을 못 먹게 했기 때문에 그 반발로 초콜릿 회사를 차리게 된 윌리 웡카는 초콜릿 자체 보다는 그 금지된 것들의 상징을 더 강조하고 있는 셈이죠. 어린아이들의 꿈을 모두 방해할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영원한 개구장이 조니뎁에게 어울리는 설정입니다.




다만 꿈과 환상의 상징인 과자와 초콜릿을 잔뜩 그려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부드럽게 춤을 추는 뮤지컬로 만들었죠. 지금도 그 초콜릿과 과자, 캔디들의 환상이 그리운 미국인들이 많은 까닭인지 'Sicko'라는 다큐 무비를 만든 마이클 무어 감독은  1971년판에서 Charlie Bucket 역을 맡았던 Peter Ostrum의 노래를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단것에 대한 환상을 심어놓은 영화의 주범으로 찍힌 모양입니다. 뮤지컬 영화인 탓에 이 영화의 OST는 아직도 구매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주연 배우들의 춤과 노래는 몹시 수준급입니다(진와일더와 베루카 역의 여자아이 말고는 현재 배우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2005년 판의 찰리도 몹시 가난합니다. 71년판 영화에는 없던 아빠가 생긴 까닭으로 살림 수준은 좀 더 나아진 것 같긴 한데, 찰리의 가난이라는 모습은 어쩐지 모르게 팀버튼 감독의 심술탓인지 그로테스크해보이기도 합니다. 가난의 상징인 집이 좀 기울어져 있죠.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수다 떠는 거 말고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친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와 외할아버지 할머니 부부 넷이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군요.

그리고 아이에게 쓸데없는 꿈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던 71년판의 엄마와는 달리 뭔가 모르게 2005년판의 찰리 부모님은 긍정적인 모습도 보여줍니다. 자주 웃을 일이 없고 돈을 벌기 위해 고생하는, 71년판의 찰리는 참 슬픈 모델이죠. 박스채로 또는 아버지 회사의 전직원이 매달려서 황금티켓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단 두 개의 초콜릿을 뜯어봤다고 이야기하고 선생님에게 창피를 당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컴퓨터'나 '핸드폰'같은 고가의 기기로 대체되겠지만,
돈많은 아이들 말고는 누릴 수 없었던 사치, 초콜릿과 사탕 그리고 손으로 만든 과자들.
그 풍요와 꿈의 상징 앞에서 아이는 항상 무력해지고 기가 죽습니다. 이런 풍경은 현대 버전의 찰리에게는 많이 무색해졌지만(그러니까 요즘 애들 말로 궁상은 떨지 않지만), 꿈을 돈으로 얻을 수 있는 풍경을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절대 외면하기는 힘든 모습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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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판의 뮤지컬에서는 움파움파는 실제로 키가 작은 사람들을 분장시켰기 때문에 모두 얼굴이 다르죠. 그러나 2005년판에는 당당히 그래픽으로 합성을 합니다. 모두 똑같은 얼굴로 춤을 추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71년판에서 이용한 특수효과란 것은 별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상상력을 표현하는 방법에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맘껏 먹을 수 없었던, 초콜릿 과자를 잔뜩 보여준 것 만으로도 당시의 아이들은 꿈에 부풀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약간 무시무시한 선명한 푸른색으로 장식된, 조니뎁이 출연한 영화에서는 대신 멋지게 탄생한 유리 엘리베이터나 기계들을 보여주고 있군요. 아무래도 현대에서 표현할 수 있는 꿈이란 건 조금 차갑습니다.

몸이 아프고 피곤할 때는 희한하게 단것이 먹고 싶어집니다. 산에서 지쳤을 때 권하는 음식 중 하나도 사탕이나 초콜릿이고 피곤에 지친 사람들에게 피로 회복용으로 권하는 음식 중 하나도 초콜릿입니다. 저는 요즘도 지친 날에는 '초콜릿 천국' 속에서 보았던 판대기 초콜릿의 꿈을 꾸곤 합니다. 제목도 모르고 어린 시절 정신없이 시청했던 그 영화는 아무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과자나 간식거리의 상징이었습니다. 윌리 웡카가 맘대로 먹어도 된다고 하던 그 판대기 초콜릿들이 지금 나이가 되서까지 꿈에 등장할 줄은 몰랐는데, 영화의 영향력이란 재밌습니다.

지금은 싸구려 '단것'들이 흔하고 천하게 여기지는 시대라서 달고 많이 먹을 수 있는 초콜릿은 더 이상 로망의 대상은 아닐 듯 합니다. 물론 가난한 가족과 부자인 가족 간의 경제적인 차이는 여전하다고 할 수 있지만 천원짜리 초콜릿 하나 정도는 그래도 사먹을 수 있는, 공산품이 흔한 사회가 되었고 상대적으로 정서적인 문제가 경제적인 문제 보다 더 부각되는 사회이니 말입니다. 지금 아이들의 로망은 아무래도 기계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대동화작가인 로알드 달(실제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이 소설을 쓰던 그 시절. 전쟁과 가난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흔하던 그 시절과 1971년판 '윌리 웡카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영화가 발표된 시절엔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이 흔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굵직한 판대기 초콜릿 하나를 꿈처럼 생각하던 아이들이 넘쳐나고 있었고, 단것이 먹고 싶어서 사탕을 파는 사탕가게를 동경하는 아이들이 많았죠.

그런 아이들에게 '초콜릿'이란 단어가 선물하는 꿈과 단맛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었을 겁니다. 마치 우리나라 기성세대들이 '눈깔사탕'이나 '단엿'을 그리워하듯, 초콜릿과 캔디라는 단어가 그 나라 기성 세대의 향수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느 버전을 보여줄 것인가? 당연히 골라야 한다면 춤과 음악과 유머와 정이 살아 있는 못생긴 아저씨 버전의 윌리 웡카를 고르겠지만, '단것'을 먹지 말라고 배우고 자란 아이들이 기뻐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아이들이 좀더 기본적이고 단순한 것을 바라보고 기뻐했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