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 전혜린도 아닌, 루이제 린저도 아닌 감성..

BOOK 2007. 11. 10. 17:06


혹자는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는, 인터넷에 떠도는 말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논란의 중심에 갈까 싶어 아무도 잘 꺼내지 않는 이야기인 것을 알지만, 모 포털의 댓글을 도배하던 내용 중엔 이런 것들이 있다.

은희경이라는 작가 이름을 듣고 나면 쉽게 짐작이 갈 것이라고 생각도 하는데, '남자들의 적 페미' 그러니까 '절대 결혼하지 말아야할 여자 베스트 XX'같은 것들 말이다. 그 아이템 중에는 꽤 어이없는 여러가지가 대중적인 아이템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흔히 말잘한다'고 알려진 연예인들도 제법 포함되어 있곤 했고, '인기 소설가'가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다. '성폭행'같은 걸 당한 여자도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둥. 조금 못되먹은 편견으로 가득찬 그 아이템 선정에 1순위로 포함된게 은희경과 김윤아였다.


엄정화와 감우성이 벗은 영화로 더 유명했던, '이만교'의 소설'결혼은 미친 짓이다'에도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자신의 색을 결정짓는 여러가지 코드 중의 하나로 '은희경'을 선정한 그 작가는 아마도 '은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같은 것이 눈에 밟혔었던 모양이다. 조금은 과학자스러운 자신의 소설 코드로는 이해하기 힘든 감성이 아니었을까.

아주 약간의 악의를 한 숟가락 정도 넣어, 조금 비꼬아보고 싶기도 하고. 사실 '은희경류'를 좋아하는 경향성을 희귀하고 낯선 것을 보는 것처럼 '가려내는' 그 시선이 난 몹시 싫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거니까.


은희경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꾸 다른 소설가과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은.

위의 악의적인 예시는 아주 맘에 들지 않지만, 그녀가 히트한 건 사회적인 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등장은 다른 여성작가들의 등단과 함께 몹시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리고 소설 자체의 시선이나 경향성이 바뀌게 만든 계기였지만,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혜성은 아닌 이유이다.


그녀 이전에 히트한 작가들, 그리고 그녀와 비슷한 시선을 공유했지만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주제를 다른 방향으로 풀어낸 여성소설가들은 사실 몇명이 더 있다. '신경숙'이나 '김형경' 또는 '공지영'의 소설쓰는 방식이 그러하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껄끄러워하는 그리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주제들을 감성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풀고 와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유쾌하게 하기도 하며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외도하는 아버지', '바람피는 남자', '성폭행',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채무감', '여자로서의 생존', '남자', '성장'이라는 주제를 여성이라는 화자를 빌어 끊임없이 생산해내던 그녀들은, 당시에 성장기를 겪던 많은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등장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몹시 부담스런 존재들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나는 그녀들과 그녀들의 방식 모두를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들이 가지고 나온 이야기들은 그 사회 속에 가끔 포함되어 있던 '나의 불편함'들과 몹시 맞닿아 있는 까닭에 외면할 수 없었던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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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합승 손님 중 내 옆에 앉은 덩치 큰 남자가 앞자리 등받이에 가슴을 기울이면서 묻는다.

"기사 양반, 반포에 한시까지 들어갈 수 있겠소?"

그는 말을 마치자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뒷자리의 등받이에 뚱뚱한 몸을 기댄다.

"그때까지 못 들어가면 오늘 마누라한테 쫓겨나니까 빨리 좀 가십시다. 이거 원, 팝콘이 이렇게 무서우니."

남자는 자기의 재치 있는 말에 내가 얼마나 감명받았는지를 확인하려고 내 쪽을 힐끗 본다.

이따금 나는 남자들의 무모한 호방함에 감탄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겨우 십 분이나 이십 분 옆자리에 함께 앉아 가는 경우까지도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자기의 매력을 심어주고 싶어하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여자에게는 누구나 다 정신나간 듯한 구석이 있고 남자에게는 다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조수석에 앉은 또다른 합승 손님은 눈이 작은 깡마른 남자였다. 그가 몸을 돌리고는 술냄새를 풍기며 팝콘의 남편에게 말을 건다.

"애처가이신 모양입니다? 그게 속 편하죠."

"저는 그럽니다. 그래도 인생에서 가정이 제일 아니겠어요? 일주일에 두 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들어갑니다. 마누라하고 볼링도 치고 외식도 하고, 좀 그래놔야 집안도 조용해지고요. 잡혀주는 척 하는 게 다 요령이죠."

"근데 지금 술만 드시고 가는 길인가요?"

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은근해지고 노련한 신문관처럼 말꼬리가 올라간다.

"아, 가끔 꽃도 보고 그러죠."

그때 구석자리에서 다시 딸꾹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점점 소리가 크고 높아진다. 탭댄서의 어깨뿐 아니라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기사가 짜증스럽게 한마디한다.

"손님, 괜찮아요?"

탭댄서는 눈을 감은 채 발작적으로 딸꾹질을 해댈 뿐이다.

반포에 도착했을 때는 한시 삼 분 전이었다. 팝콘의 남편이나 그 아내나 좀 편히 잠들 수 있을 테니 박애주의자인 나는 그것이 다행스럽다.

그가 내리고 나자 신문관 남자는 돌연 고상한 표정을 지으며 비난을 한다.

"요즘도 저런 사람들이 있다니, 참 문제야."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대해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자못 장황하게 근심을 늘어놓은 뒤 그는 내 쪽으로 약간 몸을 굽히며 "안 그래요, 아가씨?" 하고 동의를 구한다. 그가 제시하는 도덕이라는 기준의 옹색함. 자기 아내에게나 증명하면 좋았을 자기의 도덕성을 엉뚱하게 내 앞에서 강조해놓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적 신뢰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아둔함. 얼굴에 빤히 나이가 보이는데도 '아가씨'라는 말로 내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례함.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인데, 이 모든 것을 무척 점잖게 한다는 점, 나는 이 모든 것이 싫다. 무엇보다 나는, 취했다.

<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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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선명하게 말하건데.

나는 그녀들 가운데 은희경의 글쓰는 방식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는 것.

이만교의 소설대로 그 경향성 하나가 나의 '코드'를 결정하더라도

누군가의 댓글 속에서처럼 '피해야할 여자'의 속성  중 하나로 선정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의 글쓰기 방식이나 소재가 가끔 신경을 긁곤 했다는 것.

처절한 생존의 김형경이나 우울한 감성의 신경숙이나, 새침한 공지영과는 다르게

약간은 삐뚤어지고 비겁하지만, 유쾌한 그녀, 은희경의 표현 방식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당시 유행하던 'Cool'하다는 단어 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다는 것.

.... 그건 감성적이지 않다는 것과 우울하지 않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랬다는 것.

이건 여성스러운(?) 시선을 가진 남성 소설가들은 줄 수 없었던 그녀 만의 감성이기에 몹시 소중하다.


여자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어떤 존재인지 각성하게 되는 계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연인을 만나거나 충격적인 경험을 얻는 방법도 있지만, 스스로 겪은 일이 잘 정리되지 않고 표현할 방법도 몰라 말문이 막힐 때, 그럴 때는 그녀들의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조금 겉멋이 들어 타인들과 농담을 나누고 싶을 땐 '은희경'이 가장 훌륭한 유머의 방식이 아닐까 추천하고자 한다. 쿨하다. 조금 우울하다. 그렇지만 아주 비겁하지 만은 않게 적당히 도망간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이건 예전에 유행하던 전혜린이나 루이제 린저들의 직접적인 바라보기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그리고 안으로 안으로 자신을 밀어넣던, 그 이전의 방식과도 조금 다르다.


마지막으로 한문장 심술을 섞어 적자면.

그녀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는 당신은 진짜 여자를 모르는 거다.

(은희경의 책을 고르면, 당연히 사랑의 기술에 대한 책이 추천되는 까닭이 대체 뭘까..이 놈의 편견이여)

아, 그리고 보니 최신간을 제외한 그녀의, 모든 책을 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백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재치

BOOK 2007. 10. 31. 12:32


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어느 출판사인지 알지도 못할 만큼 오래된, 세로줄 읽기 고전 시리즈가 있었다.
오래된 서재를 뒤져 읽은 만큼 모든 걸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 하고 있지만
모파상이나 플로베르 등 당대의 고전들을 제법 모아놓은 그 수십권짜리 양장본의 도서들 중
단 몇권이 일본 명작에 할애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설국'이나 '나생문'같은 소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함께 읽었던 소설이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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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화법에다 맞춤법도 맞지 않는 오래된 문장, 그리고 오래된 표기법
동물이 화자로 나오는 소설이 그 당시 나에게는 몹시 흔하고 익숙했었지만
책이 출간된 시절엔 동물이 화자가 된다는 건 화제가 되기 충분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소설 속 '고양이'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치 말라고 꽤 여러번 다짐을 받곤 한다.
 
2005년은 이 작품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이 책의 완역 양장본이 두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고
예전과는 달리 아담하고 읽기 편해진 가로쓰기 신간을 나는, 소장삼아 구매하게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를 세상에 알리고 출세하게 만든 그 고양이가 사람들에게 읽힌지 백년이라..
 
몇년전에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던 단편 애니메이션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彼女と彼女の猫, Their Standing Points, 1999) 
이 짧은 일본 애니메이션은 고양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에 대한 애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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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주워진 새끼 고양이 '나'는 그녀와 함께 살며 그녀의 일상을 지켜보고 생활한다.
한없이 뒹굴거리며 애교 떨고 노니는 것만 같은 그, 고양이의 시선과 함께 그녀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삶을 유지해 나간다. 고양이의 사랑스런 시선이 유독 눈길을 끌었던 이 애니메이션의 화자는 '따뜻한 시선의 고양이'이다.
 
반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귀여운 고양이가 선택한 시선은 '무심한 날카로움'이다.
자신의 먹거리를 마련해주고 잠자리를 주고 귀여워해주는 주인, 답답한 서생을 특별히 사랑한다거나 할 수도 없고, 요령좋은 메이테이나 간게쓰에게 애정어린 시선을 보낸다고 하기도 힘들다
그저 바라보고 제 3자다운 모종의 '조소'를 보낸다고 할 수도 있고
그저 쳐다보고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을까 하는 시선을 보낸다고 할 수도 있고
무심하고 나른한 고양이는 어쩐지 좀 냉정하다..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얻은 것처럼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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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봄날의 등불은 각별하다. 천진난만하면서도 풍류와는 동떨어진 이런 광경을 비추면서 이 좋은 밤을 즐기라는 듯이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방안을 둘러 보았더니 사방이 고요한 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기둥시계와 부인의 코고는 소리, 멀리서 하녀가 이빨을 가는 소리뿐이었다. 이 하녀는 남들이 자기보고 이빨을 간다고 지적하면 언제나 그것을 부인하는 여자이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껏 이빨을 간 적이 없습니다 라고 고집을 부리며 절대로 앞으로 고치겠다거나 죄송했다고는 말하지 않고 그저 그런 기억은 결코 없다고 주장한다. 하기야 자면서 부리는 재주이니 기억이 없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의 기억에는 없어도 사실은 존재할 수가 있으니 문제이다. 세상에는 나쁜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다시없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니 천진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남들이 난처해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천진하게 굴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신사숙녀는 이 집 하녀와 같은 계통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밤이 많이 깊어진 모양이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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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양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설의 또다른 장점은
자신의 잘못도 쉽사리 인정할 줄 모르고 허풍을 떨고 위선을 떠는 지식인들에게 가소로운 시선을 보내는 고양이의 입장이 그렇다고 딱딱하고 불편한 것 만은 아니라는데 있다.
충분히 유머러스하고 웃기는 상황 묘사나 상황 설정 등도 읽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1867년 2월 9일 우시고메 바타시타 요코마치, 그러니까 지금의 신주쿠 키쿠이초에서 킨노스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교사, 전문학교 강사 등을 역임하며 도쿄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소세키는 38세가 되던 1905년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문예지에 발표했다. 1916년에 사망할 때까지 아사히 신문에 몇편의 작품을 추가로 발표하기도 했다.
 
소세키는 일본의 문물이 개방되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신문물을 배운 지식인들의 겉모양새가 얼마나 위선적인가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중 하나인 자신의 모습이 약간 부끄러웠던 것일까?
천 엔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다는 소세키의 얼굴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 속에서
어떤 번뜩이는 재치를 발견하고 글로 표현하게 되었을까?
 
세상의 모습은 반복되고 반복된다고 하던가.
희한하지만 백년이 지나 세상이 변해도 지식인들의 위선과 허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고전이라고 해서 특별히 딱딱하거나 어려운 말을 쓰거나 하지 않고 재치있게 표현된
이 명작을 심심파적삼아 읽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이 고양이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세상을 보고 함께 웃어주는 고양이니까
 
 
이미지 출처 : 리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