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함께 동행할 수 있는 '황홀한 여행'

BOOK 2008. 10. 15. 22:36


어떤 지역를 여행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직접 그곳을 발로 밟아보는 방법, 그곳을 묘사한 글을 읽는 방법, 그곳을 이야기하는 노래나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 마음의 감동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직접 바라보고 희노애락을 느껴보는 것이겠지만 정보를 얻거나 감히 '짐작'하기에는 누군가에게 듣고 추측하는 방법도 그리 나쁘지 않다. '80일 간의 세계일주(1873년)'가 발표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오렌지꽃 피는 나라, '이탈리아'를 방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직접 볼 수 없는 그곳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또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많은 이름과 역사를 알고 있지만 그 나라를 밟아본 적 없기에, 이번에 새로운 방법으로 이탈리아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이 아닌, 그곳을 밟아본 경험을 누려본 같은 나라의 사람, 그 중 한 사람이 이탈리아를 밟고 쓰는 글 역시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좋은 방법이리라. 스케쥴도 여행의 길잡이도 여행을 위한 슈트케이스 조차 갖출 여유가 없는 자를 위한 여행. 유난히 따뜻한 밝은 한국의 가을빛과 함께 그 사주 간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날 때 마다 빠져드는 이탈리아 이야기. 폼페이와 로마에 관한 책은 많이 읽었지만 그 유적 속에서 현대인이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는 한번도 신경써본 적 없다. 피렌체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피렌체가 현재 어느 유명 브랜드의 전시장인지는 염두에 두어본 적 없다. 여행을 안내하는 집필자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실제의 차이를 조명하려 노력한다. 마치 그가 직접 보고 나서 만든 별개의 세계로 다른 여행자를 끌어들이듯.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탈리아라는 이름을 몰라도 즐기는 것들이 있다. 파스타를 볶거나 얇은 피자를 뜯어먹으며 두꺼운 피자에 비해 바삭해서 좋다는 한담을 나누기도 하고 그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 지도 모르면서 파바로티나 마리아 칼라스의 음악을 함께 듣기도 한다. 소고기 완자 혹은 갈아넣은 소고기와 함께 만드는 스파게티를 만들어줬더니 볼로냐 이야긴 잘 모르지만 이탈리아에서 모두 이런 스파게티를 파는 줄 알았다며 이탈리아 여행을 하자고 말하던 사람도 있다.

생각 보다 가까운 이탈리아건만 아열대 기후 햇빛처럼 바삭한 이탈리아식 피자 도우와 각 지방별로 다른 파스타의 조리법과 생김새를 제대로 구분할 능력같은 건 없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이런 독특한 맛을 볼 수 있게 해준 그 지방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그곳의 태양과 풍경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우리네 칼국수를 즐기듯 먹는 스파게티와 우리가 특별히 만들어먹는 스파게티는 어떻게 다를까.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을 책 본문 중엔 이 볼로냐 스파게티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등장한다. 그 볼로냐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었노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 볼로냐 지방엔 소고기가 유명하고 그 고기의 맛을 살린 볼로냐식 스파게티가 유명한데 좋은 음식이 많아 그런지 볼로네제들은 통통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큰 사이즈의 스테이크를 좋아했던 로시니와 파바로티가 대표적인 볼로네제란 부분을 읽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잘 알 수 없었던 이탈리아의 문화들. 그를 잘 알게될 수 있음이 여행의 기쁨이리라.


이 책을 여행하려면 목차를 자세히 보아둘 필요가 있다. 베네치아에서 시작해 바리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가장 화려한 곳부터 가장 한적한 곳까지 17개 지역으로 나눠 적은 책을 여행하자면 내가 가장 가고 싶은 이탈리아 여행지는 어디인지 쉽게 고르기 어려워질 수 있다. 책 초반에 소개하듯 이탈리아는 지역 특색이 다양하고 볼 수 있는 문화도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그중에 어느 곳이 오래 밟고 싶은 땅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사진이나 책으로도 실제 여행으로도 다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영화 속 스페인광장과 멋진 분수들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 베네치아의 그림같이 켜켜이 쌓인 역사를 부러워하게 될 지도 모른다. 오드리 헵번의 추억을 아름답다고 느끼다 카사노바의 유쾌한 과거에 웃음지을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 공존한다. 책으로 할 수 있는 여행은 시간도 공간도 큰 제약을 받지 않길래 상상의 나래가 유난히 커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라는 곳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문화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그곳을 방문하지 않은 '읽는 자' 역시 한달 간 즐거운 추억을 가지게 된다. 같은 책을 읽으며 같은 곳을 여행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지만 역시, 기행이라는 장르에 필히 들어가야할 것은 그곳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사진일 것이다. 홀로 다녀온 여행을 그린 책에는 유난히 쓸쓸한 사진이 많다. 넓디 넓은 바다를 그린 사진들과 아무도 없는 오솔길을 찍은 사진들, 아무도 줍지 않는 떨어진 오렌지와 무성한 오렌지 나무들. 책을 통해 여행하며 그 장소를 그리워하다가도 종종 젖어오는 그 쓸쓸한 사진들에 누군가를 동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다. "베네치아에 혼자 오지 마라. 꼭 누구와 함께 오라. 왜냐하면 누가 당신 옆에 있더라도 그에게 쓰러질 것이므로...." 여행을 권하는 글 중에 적힌 문장처럼 '황홀할 여행'에 같이할 존재를 옆에 두어야할 것같다.



박종호의 황홀한 여행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박종호 (웅진지식하우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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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리뷰룸에 응모하고 2-3주 정도 책을 읽었는데 생각 보다 시간이 촉박하군요. 좀 더 오래 책을 잡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책과 리뷰 한편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경험은 괜찮군요.



Casanova - 시청자를 쥐었다 놓았다 하는 영국 카사노바

DRAMA 2008. 2. 29. 17:40


확실히 모든 건 관점의 문제다. 불성실한 사랑의 상징이었던 카사노바, 카사노바의 수작에 걸리면 인생이 혼란스러워(?)지고 영원한 사랑은 불가능하리란 전설같은 고정관념을 깨고 그가 재해석된 건 현대의 분위기 아닌가 싶다. 정력의 상징인 듯, 굴을 좋아하는 그의 독특한 식사법이 화제가 되고 과연 그가 사귄 여성의 숫자는 몇명인가가 화제에 올랐던 시절, 카사노바에게 정절을 뺏기고 버림받은 여성을 손가락질하던 시절이 지나버렸단 뜻이다. 여성 문제 이외에도 천재적이었던 그의 삶에서 그래도 '사랑'은 빠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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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능동적인 '연애 심리'를 자극하여 '여성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말을 실제로 남겼다는 카사노바. 그의 재해석은 2005년 유난히 활발하여 한 편의 드라마와 한 편의 영화가 발표되기에 이른다. 영국의 천재적인 극작가 Russell T. Davies와 10대 닥터로 유명한 David Tennant, 그리고 칼리큘라의 티베리우스 황제로 유명한 Peter O'Toole이 발표한 미니시리즈 'Casanova(2005, TV)' 와 지금은 고인이 된 Heath Ledger와 유명배우 Jeremy Irons가 주연한 'Casanova(2005)'가 그것이다.

드라마의 관점과 배우, 제작진도 쟁쟁하지만 영화 쪽의 배우들과 제작진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차분이 두 편을 비교해보고 싶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카사노바가 연애 이외의 분야에서도 천재적이었다는 사실과 여성을 먹이감으로 여기며 사냥하던 타입은 아니란 사실, 그리고 사랑을 몹시 중요하게 생각한 인물이란 사실 만은 비슷한 관점을 취하고 있다.
Russell T. Davies는 좀 더 수동적이고 부드러운 카사노바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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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터에 가까운 키에 천재적인 능력. 유명한 계몽주의자 볼테르를 비판하기도 하고 법학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던 카사노바는 실제로 의학이나 법률 분야의 지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경력도 있다고 한다. 모험가 기질을 가졌던 그는 관심을 가졌던 웬만한 분야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고 꽤 괜찮은 능력을 보여준 적이 있다고. 변호사, 의사, 신학자, 사업가, 바이얼리니스트로 활약하는 카사노바의 모습을 드라마 속에서 조금씩 볼 수 있다.

사제들에게 이단으로 추적당하고 추방당하기도 여러번, 자신이 사귄 여자들의 자세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입에 오르내릴 뿐(볼테르나 루소같은 경우는 숨겨진 자식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다. 음흉한 이들에 비하면 카사노바는 몹시 솔직한 편) 약간은 사기꾼같지만 바람둥이로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면 분명 다른 분야로 유명해졌을 천재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한다. 극중에서도 묘사되듯 프랑스에 이태리 복권(lotto) 아이디어를 처음 전파한 사람은 카사노바일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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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양자가 되기도 하고 조지 2세같은 영국국왕과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프랑스 궁정도 드나들었던 이 남자. 한 때는 이태리 그리마니 공작의 숨겨진 아들이라며 주장했단 기록도 있는데, 이 대단한 활동에 숨은 욕구는 '신분상승' 아니었을까 싶다. 배우의 아들로 태어나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천재적인 능력을 갖췄음이 인정됐지만 타고난 신분의 한계로 천대받았을 지 모르는 그에게 유일한 재산은 능력과 인맥(비록 여성을 통한 것일지라도) 뿐이었다는 것. 늙어서 사서로 일하게 된 그의 몰락과 어려움은 예정되어 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대단한 각본가와 대단한 배우가 만나서 대단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자체로도 흥미로운데 더욱 재미있는 건 이 드라마의 재미가 단발적인 이미지로는 잘 표현이 안된다는 것이다. 영국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이태리와 프랑스의 문화이건만(영국인의 유럽 아랫 나라에 대한 편견은 재미있다) 이태리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국을 묘사하기도 하고 여성을 만나고 다니는 모험이 각국의 문화적 특징과 맞닿아 특이한 풍경으로 변질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춤추고 놀기 좋아하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파티장은 하루 종일 빙빙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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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눈빛을 가진 배우, 데이비드 테넨트가 보여주는 카사노바는 장난기 가득하고 순수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상냥하고 선천적으로 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버전의 카사노바는 여자를 농락하고 있는 남자가 아니라 여성에게 이용당해주는 남자일 뿐이다. 시대상에 따라 욕망에 솔직할 수 없던 여성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던 남자란 자신의 해석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한다. 비록 사귄 여자의 범위가 너무 넓어 수녀는 기본이고 동성연인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여자가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 그의 표현은 재미있다.

이 드라마는 3시간 안에 카사노바의 삶을 잘 요약한 편이다. 늙은 카사노바가 과거를 회상한다는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그 점이 영화와 다를 것이라고 본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며 바람기를 유지하는 이 남자의 삶이 흥미진진하다. 늙은 역으로 출연하는 1932년생 피터 오툴(2008년엔 Tudor라는 드라마에서 교황역으로 보게 된다)이 로즈 번(Damages의 엘렌 파슨스 역할을 맡았던 배우)에게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며 보여주는 장난기도 만만치 않다(카사노바는 늙어도 카사노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