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영국사랑이야기(英國戀物語エマ) - 19세기식 영국 사랑 이야기

ANIMATION 2008. 3. 17. 06:36



이 애니메이션은 '엠마(エマ)'라는 제목을 가진 만화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모리 카오루 원작). 19세기초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국식 사랑이야기라는 테마이다. DVD의 생뚱맞은 제목 '빅토리아풍 로맨스 엠마'는 동시대의 영국 분위기를 설명하는 말이다. 산업혁명을 맞아 런던에는 공장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한다. 정통 귀족들은 몰락하거나 새롭게 입성한 부자들로 대체되고 유럽은 바야흐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오래된 전통이 살아있는 런던과 가난한 서민들과 귀족들의 갈라짐이 분명한 그 도시에서 하녀일을 하고 있는, 특별한 주인공 엠마. 19세기 영국붐을 일으킨 그녀의 애니메이션.



새벽부터 현관을 쓸어낸 다음 꼼꼼히 현관 옆 손잡이를 닦아내고, 석탄을 넣어 불을 피우고, 일일이 유리를 닦아 광을 내고, 거실의 먼지를 쓸어내는 부지런한 메이드 엠마. 세제도 효율적인 도구도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에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들은 경험에 의한 지식 뿐일 것이다. 레이스 두건 아래 여러겹의 속치마와 검은 드레스를 입고, 때묻은 커다란 앞치마를 걸친 메이드 엠마는 유난히 차문화가 발달한 영국의 홍차를 주인과 손님에게 대접할 방법도 익히고 있어야 한다.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강도의 노동이다.

과거 윌리엄 죤즈의 가정교사였던 케리 부인은 엠마를 딸처럼 아끼면서 메이드로서 받기 힘든 대접을 해준다. 어릴 적 납치됐던 엠마가 일자리를 구하는 걸 알고 데려와 일을 하게 해주고 엠마가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 꽤나 비싼 물건에 속했던 안경을 사주는가 하면(안경쓴 사람 자체도 흔치 않았지만 안경낀 메이드 자체는 더더욱 보기 힘들었다) 글을 가르쳐주고 여러 예의 범절도 익히게 해준다. 엠마 역시 케리 부인을 믿고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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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가 일하는 케리부인의 집. 아기자기한 사진들과 과거의 추억이 새겨진 집이다. 카펫과 계단 같은 곳을 거의 매일 쓸고 닦아야하는 메이드의 일터이다. 어린 시절 엠마를 데리고 와서 메이드로 키운 케리부인은 엠마에게 일반 메이드 보단 특별한 대우를 해준다.

런던은 꽤나 독특한 도시라 현재에도 과거의 생활방식을 보여주는 주택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19세기 런던은 빅뱅이나 런던탑, 로열패밀리들의 궁전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공장을 세워 부를 일구어냈다. 시장과 거리를 가득 메꾼 서민들의 분주한 느낌은 사회, 경제적인 변화를 한참 진행 중인 영국을 보여준다. 신분이 뒤바끼기도 하고 주된 돈벌이가 변화하기도 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리고 힘없는 여자아이들은 인신매매를 당하기도 하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길거리에서 꽃을 팔아야할 떄도 있다.

아주 적은 월급일지라도 고정적으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기 때문에 노동력이 싼 값에 공급되던 시절이기도 하다. 신흥 졸부들은 세계의 식민지들과 런던의 서민인 그들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또 그들이 아무리 돈많은 사람들일지라도 단단한 영국 귀족의 뿌리 속에 쉽게 흡수되지는 않는다. 귀족이 되기 위해 밤새 파티를 벌이고 연줄을 맺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절. 비록 메이드일지라도 뚜렷한 직업을 가진 전문가 '엠마'가 이 19세기 초 영국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그 변화가 '사랑'의 변화가 될지 아니면 '신분'의 변화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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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의 캐릭터가 제법 특이한데 메이드로서 제법 능숙한 능력을 자랑하는 엠마는 갈색머리에 큰 눈을 가진 지적인 미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만 시력이 좋지 않아 먼 곳을 볼 수 없고, 몹시 침착한데다 쉽게 웃지 않는다. 상류계층 윌리엄과의 격차를 깨닫고 거리를 둬야한다고 생각할 만큼 사려깊은 성격이기도 하다.

보통 '메이드'를 주제로 한 애니라면 미소녀 애니메이션류를 상상하기 마련이다. 이유없이 어린 여자아이가 메이드 복장을 하는 이유는 설정에 의한 코스프레겠지만, 정통 메이드인 엠마와 비교할 수 있는 코드는 전혀 아니다. 이 만화가 화제가 되었던 이유 중 몇가지는 19세기초 영국의 풍경과 상황을 제법 꼼꼼하고 정확하게 재현해 내었음은 물론이고 하녀들 말고는 알기 힘든 몇가지 지식들도 에피소드 속에 잘 녹아들게 만들었다는 거다. 배경이 배경인 만큼 요즘 만들어지는 작품들처럼 파격적인 사랑방식을 취하거나 하지도 않고 그림에 녹아들 듯 천천히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런던거리엔 귀족들이 사용하는 작은 마차도 돌아다니지만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는 짐마차들도 바삐 돌아다니고 빅뱅 아래로 흐르는 템즈강엔 증기선이 사람을 태우고 들락거리고 있다. 양품점엔 신기한 동양의 물건들이 쉴새없이 만들어지고, 한참 발달하기 시작한 수공업 물건들도 판매점을 채운다. 엠마가 비싼 물건이라 정말 가지고 싶었다고 말하는 손수건은 요즘 같은 기계자수 물건이라기 보단 손수 만든 레이스 자수였을 가능이 크다. 집에서도 항상 단정한 복장이던 엠마는 짙은색 모자와 코트를 걸치고 얌전하게 걸어 장을 본다. 영화가 연상되는 빅토리아 시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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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등장부터 엠마에게 호감을 느낀 윌리엄. 자연스럽게 윌리엄을 대하는 메이드 엠마에 비해 윌리엄은 어쩔 줄 모른다. 케리 부인 집주변을 들락거리며 자연스럽게 엠마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엠마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윌리엄은 신분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사랑은 '애정' 하나 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주 등장인물은 엠마의 연인이자 상류 사회 문화에 지루함을 느끼는 윌리엄 죤즈, 엠마, 그리고 깐깐한 성격의 전형적인 영국 여성, 케리 부인 정도지만 이 두 사람의 험난한 사랑을 장식할(?) 주변 인물들은 제법 많다. 윌리엄의 복잡한 부모들과 형제들이나 정략결혼 상대자가 되는 귀족 엘레노아. 주인을 수족처럼 보좌하기도 하는 죤즈 집안의 하인들, 윌리엄의 독특한 친구, 하킴 와타하리(인도의 왕족이란 설정인데 20세기 초 영국과는 달리 제법 대접을 받는다) 등이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과연 코끼리를 타고 런던을 배회할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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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를 보고 싶어 자신의 옛 가정교사인 케리 부인의 집 앞에서 바라보는 윌리엄, 오래된 영국식 저택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집이 유난히 많다. 19세기에 지어진 이런 분위기의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들이 있다고 한다. 종종 볼 수 있는 이런 풍경들이 이 애니의 장점 중 하나이다.

윌리엄과 엠마가 속한 세계가 다른 만큼,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오래전 방식 그대로 두 사람은 조금씩 조심스러운 사랑을 이어가고 있고(당시로서는 파격이었을까나) 주인공 엠마는 그렇게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성격이다(눈이 나빠서 앞의 물체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했던 엠마가 마음을 돌리고,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했다고 해서 이야기가 급진전되는 것은 아니란 말.

1기 엔딩으로 사용된 'Menuet for EMMA'라는 곡은 유명 작곡가 양방언의 음악이다. 옛날 느낌을 풍기는 소품들이나 거리 장식 만큼이나 음악도 아름답게 애니를 받쳐주고 있다. 잔잔한 엠마의 미뉴엣이라니 애니 속 템즈강과 거리 만큼이나 상상하기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프닝곡 'Silhouette of a Breeze' 역시 양방언이 작곡한 특별한 음악. 배경, 인물, 음악, 작화, 구성 모든 것이 풍경화같은 느낌을 주는 잔잔한 애니메이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