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中錄(한중록) - 사람 속이 미련없이 갈라지면 아무 시름이 없겠소

BOOK 2008. 5. 16. 11:23


무릇 이 시대에 사라져야 마땅한 '국모(國母)'라는 호칭이 당연히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1910년 8월까지 존속했다는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임금과 황제는 한반도 땅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아내를 사람들은 국모라 불렀다. 왕후와 왕제의 자질은 어진 백성과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자질과는 다른 그릇을 타고나는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유난히 그들 앞에 깍듯했고 왕후 역시 그들을 대함에 모든 시름을 숨기고 의젓함을 잃지 않았다. '왕과 왕후의 자리는 하늘이 내린 것'이란 속설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가 보다.

비록 왕후 자리에 추존되었으되 살아서는 '중궁전(中宮殿)'이라 불려본 적 없는 왕의 어미에게도 같은 자질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한중록(恨中錄)을 쓰며 한가한 듯, 험난한 세월을 상기하던 헌경왕후(獻敬王后)는 어찌 보면 왕후 보다 한 계단 더 높은 자질을 깎아야했을 지 모른다. 왕의 며느리이자 왕의 어미이며 왕의 할머니였으나 시아버지도 아들도 손자도 핏줄의 위계에 따라 자신을 대접하지 못했던 그 세월, 그 깎고 깎아야할 자연스러운 혈육의 욕심을 어찌 가볍게 넘길 수 있었으랴. 친며느리가 효부로 칭송받는 효의왕후(孝懿王后)라 한들 대비 자리에 오르지 못한 자신은 궁중 의례가 있을 때마다 내명부 빈의 지위로 며느리에 사배하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열살어린 호랑이 시어미 정순왕후(貞純王后)와의 갈등은 어찌 넘기었을까. 물욕은 차치하더라도 어미 대접은 받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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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사람들이, 한중록은 혜경궁이 홍씨 집안의 변명을 위해 씌여진 글이라 잘라 이야기하곤 하지만 사람 속이 그리 모질게 한 마음으로 흔들림이 없으면 무슨 근심이 있으랴. 왕후 자리에 타고난 인물이든 내 집안의 흥망을 위해 진심을 다한 인물이든 그는 천갈래 만갈래 갈라진, 열길 물속 보다 알 수 없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의 생각이 오로지 홍씨 집안의 변을 위해 분주한 듯 보인 건 그 집안 최고 윗자리가 된, 헤경궁이 아니면 멸족을 면치 못할, 번듯하지 않은 혈연들 탓이리라. 사람 속이 그리 정확히 갈라지면, 아들은 어이 살렸으며 죽은 남편은 어찌 그리워하리오. 감히 짚을 수 없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그려보리다. 그리하여 쓰는 늦은 봄 한중만록(閑中漫錄 - 한가로이 붓가는대로 쓴 글)이라.


마노라는 풍산홍씨 홍봉한의 딸이다

여섯 권 한중록 중 첫권은 환갑을 맞은 혜경궁이 임금 자리에 오른 정조를 두고 조카 홍수영의 부탁을 받아들여 썼다 한다. 아비가 죽고 숙부가 운명을 달리하였으나 한가롭게, 환갑을 맞아 정조의 효심을 누리며 자신의 어린시절과 젊은 시절을 기록한 그는 그 시절엔 쉽게 그 한과 애닮음은 적지 못하고 입궁할 때 있었던 이야기와 집안의 내력을 세세히 적었다. 비록 홍봉한이 죽었다 한들 왕이 된 아들을 둔 뿌듯한 마음으로 경모궁의 죽음을 차마 어찌 적을 것이냐. 더해 영조와 두 성모의 은혜를 어찌 다 옮길 수 있으랴. 그러나 세상에 아버지와 같은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가 어디에 또 있으랴. 홍씨 집안의 한 딸로 궁의 은혜를 입어 집안의 모든 사람에게 마노라로 불린 혜경궁은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도 남을 어른이었다.

한 집안 족보에도 쉬이 올라가지 못할 여자아이로 태어나 집안의 사당에 절을 올릴 수 있는 기회는 감히 얻기 어렵다. 임금의 허락을 받아 사당에 하례하고 초례를 치뤄 궁중의 비빈이 된 그는 그때부터 사소한 일상을 아버지와 의논하며 궁중의 일을 낱낱이 고하게 된다. 한중만록의 첫장은 아녀자의 편지가 궁안을 나도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노라의 편지를 모두 모아 물로 씻어버렸노라 말하는 홍봉한의 당부가 적혀 있다. 궁궐 내 한 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땅히 많은 윗전을 섬기고 노련한 아랫상궁들을 부려야 할  터이지만 10세의 어린 아이가 능히 그들을 다룰 수 없음에 부모가 항상 타이르고 임금은 그 가족들을 입궁시켜 허전한 그의 마음을 가시게 해주었다. 시집을 나라로 왔으되 어찌 그의 부모가, 그의 집안이 세상에 가장 귀한 사람들이 아닐 수 있었으랴. 노론이 무엇이며 임금의 은혜가 무엇이냐. 궁의 변고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거두는 부모와 형제와 숙부, 계부 만한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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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때 궁에 입궐하여 81세의 노구로 궁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70여년의 인생을 궁에서 울고 웃었던 혜경궁은 철부지 어린 시절을 어린아이로 살기 보다 집안의 기둥으로 궁안의 세 명의 윗전을 모신 며느리로 사랑받던 옹주들과는 다른 궁중의 삶을 살았다. 할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집안 어른들이 문안온 일들, 경모궁의 됨됨이와 인원왕후 정성왕후, 그리고 선희궁에게 사랑받고 도움받던 일들을 적으며 그의 육십평생을 적으니 마노라가 첫권의 한중록을 적을 때는 자식이 성하고 주변이 환하니 굳이 책의 제목을 한(恨)'이라 짓고 싶지는 않았음이라. 첫번째 한중록의 권이 진정 한가로운 글이다. 자신을 감싸던 집안이 그리우나 그들이 모두 가고 없고 자식은 죽어 어린 시어미 정순왕후가 승하고 친며느리가 윗전이 되니 풍산홍씨 집안의 딸에게, 한(閑)이 한(恨)이 되었으리라.


혜빈은 경모궁의 조강지처이다

열 살에 아내가 되어 세손을 둘 낳고 군주를 둘 낳은 혜빈은 1744년 세자빈이 되고 1762년에 남편을 잃었다. 사후에 사도세자, 장조의 시호를 받은 경모궁과는 16년 동안을 부부로 지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지아비의 죽음을 간신히 한중록 한권에 적었으나 정조가 오래 나이먹도록 '그 일'을 차마 떳떳이 말할 수 없었다 전한다. 혜빈의 시아비와 시어미, 그리고 시누이들과 지아비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 후손들이 함부로 그 극악한 하루를 말하지 못하나. 어이 하여 경모궁의 아들은 노론과 그 외가의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가. 부군의 죽음을 보고도 자식을 생각하여 촌철로 명을 끊지 못한, 눈물많은 혜경궁은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자애로운 시아비 영조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귀한 아들 정조의 이름을 해치지 않으며 남편 경모궁의 험하고 짧은 인생사를 적을 방법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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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인원왕후, 정성황후, 정순왕후, 선희궁과 만만치 않은 여러 시누이, 옹주들을 봉양하고 보살피며 궁중의 일원이었던 그가 윗전들의 특별한 미움을 받은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경모궁과의 살뜰함을 소중히하기 보다  궁중의 험난한 삶을 행여 이겨내지 못할까 염려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그의 정치적인 삶은 화완을 정처라 부르며 원망하나 그를 제외한 나머지 시가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허나 혜빈은 두가지 점을 들어 영조를 원망하였다. 영조는 경모궁이 태어난 지 백일 만에, 그 어린 아기를 직접 거두지 않고 왕세자로 책봉한 후 저승전에 들였다. 법도를 갖추는 것은 좋았으나 어미의 정을 모르는 어린 아기에겐 가혹한 처사였다.

또한 경모궁이 거처로 정한 저승전은 원통하게 죽은 경종의 비 선의왕후 어씨가 죽은 곳이자 숙종대의 장희빈이 죽은 취선당과도 가까운 곳으로 어대비의 내인들이 전각을 지키고 있었다. 영조와 그의 후손들을 가벼이 여기는 그 나인들에게 경모궁을 맡긴 일은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아닐 수 없음이라. 대조는 어찌 경모궁의 심약함을 전혀 살피지 않았으며 저승전의 상궁은 무슨 심사로 왕세자가 어지러운 것들을 가까이 두게 하였나. 혜빈에겐 그 모든 것이 운이 맞지 않음이고 가혹한 명이니 사악한 사람들이 어질고 덕있는 사람들의 눈을 흐리며 경모궁의 병이 모년사를 더 힘들게 하였음이라. 타고나게 덕이 있고 침착하던 경모궁에 대한 글을 적고 지아비에 대한 몇줄의 원망도 적었으나 사무치는 그리움은 적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궁에 살던 사람의 냉정한 법도인가 부덕한 지어미의 정이 모자람인가.


그러나, 혜경궁은 아들을 죽은 자의 양자로 보낸 어미이다

어린 순조를 두고 피 섞이지 않은 증조 할머니,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고 이미 세력을 잃은 풍산홍씨의 가문이 점점 쇄락해감을 보며 순조의 친할머니 혜경궁은 모년사의 일을 정확히 적어보기로 한다. '그날'의 일을 간악한 무리들이 함부로 말하고자 하나 영조의 명으로 옳다 그르다를 언급할 수 없게 되었으니 딱히 밝힐 방법이 없었음이라. 정조의 이름에 누가 될 기록들도 정정하고 홍씨 집안에 씌운 누명도 벗어보리라 한중록을 보태어 적는다. 그러나 경모궁이 죽고 영조와 선희궁에게 스스로 어린 아들을 들여보낸 혜경궁은 이미 정조의 어미가 아니었음이라. 진종 효장세자의 아들로 영조의 뒤를 잇게 되니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혈통을 의심받는 것 보단 나으리라. 왕의 자리에 올라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를 바라보는 정조에게 헤경궁의 처지가 참담해지는 것이 애닮은 일 아니었을꼬.

이 모자의 슬픈 세월을 권력을 두고 벌인 승리라 할 것인가 아득한 먼 옛날의 슬픈 사연이라 할 것인가. 유달리 아들을 아꼈던 혜경궁은 한과 억울함을 고변하되 친정의 핏줄을 다독임도 잊지 않으며 영조와 경모궁의 위신을 챙기는 예의도 잊지 않는 섬세함을 보였다. 영조를 깎아내림도 사도세자를 낮춰 이름도 아들의 앞길에 누가 됨을 제대로 알고 있었음이라. 그와 함께 혜경궁은 친정집의 명예가 곧 자신과 정조의 위엄이 된다는 사실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이 살아남은 자의 것이라 하고 친 아비에 대한 승정원 일기를 스스로 삭제한 정조라 하지만 사람들의 구구한 말과 혜경궁의 변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이를 두고 손가락질하여 집안과 권력 만을 위해 살았던 냉정한 여인이라고 낮춰 말할 수 있으랴.

"죽은 자는 지아비요, 아버지요, 아들이요, 그리고 핏줄을 나눈 사람들이라. 그 어느 한곳에 남은 잔정이 없으며 미련이 없을까. 앞세운 사람에게 아무 미안함이 없도록 사람 속이 미련없이 딱 하나로 갈라지면 얼마나 좋겠소. 함함한 봄꽃을 바라보며 모진 세월을 마감한 그가 죽어간 그들을 그리워하며 조금은 덜 괴롭지 않았길 바라오. 오늘 이곳에, 지아비 죽고, 부모 죽고, 친아들이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한폭 그림같은 사람을 적고 가오."



한중록(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오래된 책방04) 상세보기
혜경궁 홍씨 지음 | 서해문집 펴냄
내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캄캄하니 가슴을 두드린들 어찌하겠는가. "궤에 들어가라!" 하신들 들어가시지 말 것이지, 어찌 들어가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