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rfeiter - 전쟁과 생존과 죄책감의 무게

MOVIE 2008. 11. 8. 21:55


(스포일러 포함)

쓰레기가 수거되듯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은 총부리를 앞세운 군인들 앞에서 겁을 먹고 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 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서 몰매를 맞아 즉사하기도 하고 간신히 10대를 벗어났음직한 소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다니기도 한다. 벽과 철망을 사이에 두고 독일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즐길 동안 유태인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영화 풍경 속, 유태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그렇게 교육받은 독일인들 사이에서 한 유태인 남자가 배짱 좋게 음식과 담배를 받아먹으며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 영화는 그 인물의 과거를 기록하고 있다.

유태인은 수용소에서 제법 많은 수가 학살되었다고 한다. 기록을 읽어도 사례를 읽어도 독일이 유태인에게 저지른 일은 후손들 역시 고개를 들지 못할 그런 범죄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수용소에 수감된 일부 재주가 좋은 유태인들은 특별 수용소에 배치되어 살아남았다. 독일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그 수단을 완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소로비치는 여권을 비롯한 위폐를 만들어 뿌리는 일을 하다 1936년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수감됐고 미국과 영국의 위조지폐를 만드는 일의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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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위조 실력의 범죄자답게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다른 유태인들에 비해 깨끗하고 안정적인 잠자리, 나은 식사와 샤워시설도 제공받고, 일요일엔 쉴 수 있으며 동기 부여 차원에서 탁구대같은 휴게시설도 설치해줬지만,  그리고 음악도 종종 들을 수 있는 특혜, 무엇 보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지만 그곳에서 일을 처리하는 그의 삶은 그래도 위험천만했다. 그들은 생존 자체가 드라마일 수 밖에 없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유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군들의 그들에게 시킨 일은 나머지 유태인들을 모두 죽여버릴 수도 있는 그런 일이었다. 그렇지만 해내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는다.

소로비치에겐 모든 시설이 제공되었다. 인쇄기술자, 그래픽 전문가, 동판 제작가, 의사, 정밀 감정가들까지 모두 소로비치의 기술에 의지해 영국 파운드와 미국 달러를 생산할 수 있다. 개인 위조 전문가 시절엔 전혀 상상한 적 없는 그런 자원이 제공되었고 클래식 음악과 담배까지 제공되었다. 세계대전 막바지에 파산위기에 처했던 독일은 물자를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다른 수용자들이 죽어가는 총소리가 들리고 구타와 포행의 공포에 시달리는 그런 불안함은 여전했지만 수용소 내에 격리되어 사는 위폐제작팀들은 다른 유태인 보단 살 수 있을 거란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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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영국 위폐를 제작하겠다는 독일의 아이디어나 그 아이디어를 위해 이용된 유태인 소로비치와 그의 동료들은 항상 갈등에 시달리게 된다. 베른하르트 작전이라 불린 이 작전을 위해 독일군은 점점 더 위조팀을 닥달하게 되고, 소로비치는 그 정점에서 힘들어한다. 극중 주인공인 부르거는 아내와 아이들을 아우슈비츠에 남겨두고 왔고 폴리아라는 어린 아이는 결핵에 걸린 상태지만 약도 지급받지 못한다. 소로비치의 기지로 그곳의 생명은 구하더라도 안전은 보장할 수 없는 상태. 위조 지폐를 빨리 만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그 위조지폐로 전쟁이 길어지면 같은 민족의 생명을 더 빨리 단축할 수도 있다.


그의 동료 부르거는 위폐를 만드는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고 소로비치를 설득한다. 이 돈을 빨리 만들면 만들수록 독일을 돕는 셈이니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은 이미 다른 수용소에서 몇번씩 죽음의 위기를 겪고 공포를 느끼는 처지라 어서 만들어서 살아남고 싶다고 소로비치를 조른다. 이 영화는 한편의 다큐멘터리같은, 세계사에 남을 최대 위폐제작사건의 일면을 보여주면서 위기 앞에서 갈등하는 소로비치의 심리를 집중조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생명들과 눈앞에 있는 생명들 중 누굴 구할 것인가?  소로비치와 140명의 특별 관리 대상자들은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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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수용소 내 유태인들이 그랬듯 소로비치도 살아남는다. 천재적인 예술 재능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잡히지 않았다면 그저 조무래기 위조범 정도로 생을 마감했을 그가 세계 최대 위폐 위조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남자는 어떤 선택을 했고 그가 눈으로 직접 보게 된 현실이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만든 결과를 직접 보게 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끔찍한 것이다. 아무리 목숨이 위험해 저지른 일이라도 말이다. 때로 나치는 무자비한 권력의 상징으로 모든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상징성 만큼 극중의 상황은 주인공을 끊임없는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아무리 덤덤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들 '자신의 선택'은 자신이 감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 혹은 소설이라는 매체가 과거 어떤 인물의 행동을 미화하고 면죄부를 주기 위해 제작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루어진 사건일 지라도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을 그런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희대의 위조 지폐 사건'의 주인공이란 불명예도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일들이 많노라 이야기하는 추억도 본인에겐 지극히 괴롭고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살아남아 사람의 반성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미 정해진 악의 축'인 나치를 한번 더 비난하고 싶은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그저 이런 인생이 있었고 그 감회가 어땠노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한세기 전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으니 어느 누가 그 시절의 비극을 피부 깊숙히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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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한 생존자의 싸구려 회고담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회한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그가 돈을 뿌려대며 바닷가에서 춤추던 장면은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다.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스포일러랄 것도 없이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다. 모사에 뛰어난 재주가 있던 실존인물 소로비치는 어떻게든 침착하게 살아남는 생존능력이 뛰어난 남자였고 그의 친구 부르거가 이 작센하우젠 수용소 내 18, 19 구역에서 있었던 위폐 사건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 기술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살아남으면서 주변의 원망과 슬픈 사연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솔로몬 소로비치(실제 이름은 Salomon Smolianoff)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됐을까.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처럼 평생 그 각인을 잊지 않고 불행했던 건 아닐지. 오트스리아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스테판 루조비츠키 감독이 제작했고 소로비치 역은 카알 마르코빅스가 아돌프 부르거 역은 오거스트 디엘이 연기했다. 나치와 주변 이야기가 항상 수상에선 빠지지 않듯, 2008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etailStory.do?movieId=43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