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gersmith - 레이디, 도둑, 젠틀맨과 빅토리아 시대

DRAMA 2008. 4. 28. 01:50


미드 작가 파업의 영향은 대단하다. 2008년 1월과 3월 사이에 시청할 신작드라마의 씨를 말려버렸다. 덕분에 영국 드라마나 애니를 시청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리고 놓쳤으면 정말 아까울 뻔한 BBC 방송국의 드라마 한편을 시청하게 됐다. 바로 Fingersmith(좀도둑을 뜻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라는 제목의 시대물이다. Sarah Waters라는 유명 작가의 원작을 드라마로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레즈비언 시대물로 유명한 소설이다. 영국 드라마는 소재나 시대의 차별을 두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진지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액션과 볼거리를 추구하는 미드에 익숙한 사람들은 레즈비언 소재를 두고 '선정성'을 먼저 떠올리게 될 지도 모르지만 영드에서 골라내는 소재가 '이슈'가 되는 내용이라고 한들 장면 묘사까지 선정적이진 않다.  이 점이 바로 영드의 매력이면서도 사람들이 접근을 꺼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Fingersmith의 첫장면은 약간은 음울한 특이한 음악으로 시작한다. 숨겨진 많은 이야기를 암시하는 듯한 그 음악과 함께 19세기 산업혁명기를 맞은 영국을 보여준다. 오물과 진흙으로 더러워진 뒷골목 거리 그리고 그 지저분한 거리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일상 중 하나는 사람들의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을 구경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교수형이 가장 잘 보이는 곳, 그 집에 살며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어린 수전 트린더(Sue Trinder)가 화면에 잡힌다. 뒷골목 생활에 익숙해 보이는 그 어린 소녀 고아는 능숙하게 돈을 받고 교수형을 맨 앞자리에서 구경한다. 수전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교수형당한 여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비록 자신을 키워준 석스비 부인에게 따뜻한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런 곳에서 고아가 살아남는 방법은 소매치기나 좀도둑이 되는 길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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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는 곧 또다른 고아소녀가 등장한다. 정신병원에 갖힌 어머니가 죽는 바람에 그곳에서 길러진 소녀, 모드 릴리(Maud Lilly)이다. 자신을 데려가려 온 어머니의 오빠에게 그 또래 소녀들로서는 보기 드물게, 물어뜯으며 강하게 저항하지만, 결국 무력하게 릴리가로 끌려가고 만다. 그곳에서 갖힌 채로 별종 외삼촌의 비서로 자라는 모드는 수전과는 또다른 의미로 버림받은 삶을 살게 된다. 모드를 사랑해줄 사람이나 따뜻하게 대해줄 사람은 그 넓은 집안에 아무도 없다. 비서로서 글쓰기를 교육받는 모드는 외삼촌이 소중하게 모으고 보관하는 책들을 정리하고 서표를 작성한다. 귀족가의 레이디로 자라나지만, 시골의 그 귀족가를 벗어나 본 적없는 갖힌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모드에게 어느날 리버스라는 젊은 남자가 찾아와 관심을 보인다. 잘 생긴 외모에 정중한 매너, 그리고 조금은 무심하고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 외삼촌의 친구들이 모인 독서회에서 책을 읽어내려가는 모드를 바라보는 리버스는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냐며 모드에게 말을 건낸다. 자신은 벗어날 수 없을 거라며 절망적이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레이디 모드. 그녀와 수전의 나이는 20살이다. 물론 유일하게 모드에게 관심을 보였던 리버스는 모드가 결혼하면 릴리가에서 주게 되어 있는 유산, 현금 유산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모드에게 그림을 가르치게 되어 있는 리버스는 모드를 꼬드겨 결혼하고 재산을 차지할 음모를 꾸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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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은 좀도둑인데다 알고 있는 글은 훔쳐온 손수건(빅토리아 시대는 손으로 레이스를 만들고 수를 놓은 수제 손수건이 비쌌다, 그래서 손수건도 비싼 재물이 된다)의 알파벳을 뜯어낼 때 배운 단어 몇개 뿐이지만,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의 아가씨로 자랐다. 거친 생활인데다 도둑질한 재물을 가공하고 팔아치워서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 패거리들 간의 따뜻함을 잘 알고 있다. 반면 모드는 읽기와 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점잖은 드레스를 입은 숙녀로 항상 진주로 장식한 장갑을 끼고 있다. 자신의 책이 상할까봐 맨손으로 장서를 만지지 못하게 하는 외삼촌 탓이기도 하지만 릴리가에서 자라기 위해서 자신을 감추고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조용하고 소심하며 얌전한 성격의 모드는 그 집을 벗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새장 속의 새같다.

리버스의 음모로 인해 아 두 여자가 만나게 된다. 모드의 개인 하녀로 수전을 일하게 되면 모드의 많은 부분을 수전에게 의지하게 될테니 결혼하자고 속이고 공략하기 쉬워질 것이고 나중에 정신병원에 쳐넣을 때도 쉬울 것이란 계산 떄문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귀족가의 아가씨를 속인다는 죄책감에 애정어린 시선으로 모드를 바라보는 따뜻한 수전. 그리고 그 나이가 되도록 처음 만나본 동갑내기를 보고 서투른 친절을 베풀기 시작하는 모드. 그 두 여성이 서로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가깝게 지내는 장면이 드라마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 아닐까 싶다. 어떤 의미로 사랑받는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들은 결혼이나 남자와 같은 다른 문제들 보단 가장 가까이 있는 그녀들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수전은 그녀를 속이기 괴로워 몇번을 갈등하지만,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과 여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리버스의 협박을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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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여자의 공통점은 버림받은 천애고아란 것과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존재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현재 처한 현실에서 탈출해야할 절박함이 있다는 점이다. 수전은 리버스가 모드를 사랑하지 않은다는 사실을 알고 'Finger'를 밟아서는 안된다는 편집증 외삼촌에게 시달리는 모드의 처지를 더욱 동정하게 된다. 괴로운 꿈 때문에 약을 먹고 잠들고 자신이 재워주지 않으면 깊이 잠들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리버스에게 반항하려고 하지만 자신은 이미 공범이고 태생 자체가 'Fingersmith' 아닌가. 수전은 나날이 리버스와 결혼에 이르는 모드를 바라보기가 괴롭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그날까지도 수전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모두 3부작으로 이루어진 이 드라마에는 모두 4개의 음모가 펼쳐진다. 누군가를 위한 따뜻한 음모,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음모, 탐욕을 채우기 위한 음모, 배신감에 떨며 저지르는 음모.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과연 주인공들이 이 4종류의 '의도' 중에서 어떤 부분을 선택할 것인가는 드라마를 끝까지 보기전엔 알 수 없다. 마지막까지 끌어당기는 매력이 괜찮은 드라마 중 하나이다. 레즈비언 이야기라는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면, 마음이 허전한 두 여성의 우정 이야기로 파악해도 충분히 가벼운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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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복잡한 표정을 보여주는 배우는 모드 릴리 역의 일레인 캐시디(Elaine Cassidy)인데 항상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개인하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일상을 해결하고  런던에도 한번 가본 적 없고, 레이디답지 않게 춤도 추지 못하고 그림도 그리지 못하는 그녀의 역할은 어쩐지 시선을 사로잡는다. 글을 읽지 못하는 수전을 보고 짓는 묘한 표정과 항상 벗지 않는 장식된 장갑도 인상적인 부분이다. 어떤 처지의 레이디가 평생 처음 본 하녀에게 마음을 뺏기게 될까? 가장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는 역이면서도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사라 워터스(Sarah Waters)라는 작가는 핑거스미스 이외에도 'Tipping The Velvet'같은 소설이 유명하다고 한다. 이 드라마의 배경이 빅토리아 시대라는 건 중요한 부분인데, 시대적인 상황은 중간에 두 여주인공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절실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그녀들은 세상 물정에도 익숙치 않지만 남편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드라마 속 여성들, 모드와 수전을 제외한 또다른 여성들도 현실을 헤쳐나올 수 없다. 한편으론 그녀들의 어머니들은 그녀들이 그들을 괴롭히는 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그 비밀이 이 드라마의 재미이며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Finger나 교수대, 그리고 은밀한 다른 장치들이 상징하는 세심한 부분들도 흥미롭다.


이미지 출처 :
http://www.bbc.co.uk/drama/fingersm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