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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의 수호자(精霊の守り人) - 두 개의 달이 비치는 나라와 물의 정령
ANIMATION
2008. 4. 21. 11:56
애니를 자주 시청하지만 정통 일본식 애니는 아직도 부담스럽다. 일본 문화 자체에 익숙치 않은 면도 있지만 관습 중 몇가지는 이해할 수도 없고 나는 알 수 없는 이세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동질감은 분명 이야기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 요소 중 하나이다. 현실과는 다른 나라로 설정해두었지만, 깍듯이 무릎을 꿇고 식사하는 여성의 모습이나 일본식 문화와 환경이 나타나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일본 애니는 이국의 문화도 일본식으로 바꾸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종종 중국적인 크기의 대륙 스케일이 일본 애니에서 나타날 땐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바사라(1995)'라는 만화는 갑자기 망해버린 먼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현대식 문물도 존재하지만 과거의 일본식 문화도 동시에 존재하는 배경 설정을 만들고 있다. 대하사극과 같은 상황 설정이지만 필요할 땐 현대의 물건도 등장시키는 방식이다. 최근 애니 중엔 이런 식의 설정을 활용하는 작품이 많다. '나루토'같은 애니는 이런 설정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닌자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모든 차원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정통 일본식 애니로 생각했던 '정령의 수호자(精霊の守り人)' 역시 이런 식의 설정을 사용한다. 요괴의 설정, 풍습과 문화를 상당부분 그대로 가져오고 있지만 황국의 크기와 규모는 '황후화'에서 보던 황궁의 모습 보다도 화려하다.
'슈발리에( シュヴァリエ, 2006년)'의 제작사로 유명한 '스튜디오IG'의 2007년 작품이 '정령의 수호자(精霊の守り人)'이다. 이번에도 유려한 그래픽과 화려한 그림체로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슈발리에의 화려하고 정교한 그림체가 특징적이었듯 정령의 수호자 역시 비슷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섬세하게 표현된 정확한 비율의 인물과 배경이 이 애니의 특징이다. 그리고 칼싸움을 비롯한 전투장면이 실사를 옮긴 듯 사실적이고 박진감있다. 그러나 스토리는 '슈발리에'의 스토리가 약간의 미완성된 구조를 가졌듯 자체 흡입력이 강력하지 못한 건 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재나 배경, 시발점은 모두 완벽했지만 전반적인 매력은 다소 약하다.
발굴의 무술 실력을 가진 여자 단창술사가 신요고황국에 들어온다. 우연히 발견한 황자의 위험을 감지하고 그의 목숨을 구했으나 황족의 얼굴을 보면 안된다는 나라의 룰에 따라 감사 인사 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다. 신요고국은 넓은 황국의 크기 만큼이나 황족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신요고국의 건국사 덕분에 그 이전에 살던 야쿠의 전승은 모두 잊혀져 가고 있다. 황족은 거의 신격화되어 황족의 얼굴을 보면 눈이 먼다는 이야기도 있다. 발칸족인 단창술사, 바르사는 그날 밤 황국의 제 2황비에게 몰래 불려가 감사 인사를 받고 하나의 임무를 떠맡게 된다. 황자의 목숨이 위험하니 황자를 지켜달라는 요청이다.
황자를 지키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나는 바르사는 황자를 죽이기 위해 나선 한 무리의 암살자들과 맞서게 되고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지만, 암살자들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고 자신은 깊은 상처를 입고 만다. 지구와는 다른 설정의 이 세계엔 두 개의 달이 뜨고, 고불고불 이어진 논둑과 푸른 벼가 자라는 풍경 속에서 암살자 네 사람은 넓은 삿갓을 쓰고 황자와 바르사를 바라본다. 모자를 날리며 바르사에게 덤비는 그 장면은 흡사 영화의 한 장면인(홍콩 무협 영화나 용문객잔 시리즈와 유사했다)듯 훌륭하게 연출된다. 창과 칼이 맞닿을 때마다 그 박력이 전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다. 바르사와 암살자의 움직임도 꽤 현실감 있다.
사연많은 호위무사들의 사연인지라 종종 이런 식으로 멋진 전투씬이 연출된다. 따뜻하고 정감있지만 무술 능력은 전혀 달리지 않는 여자 무사 바르사는 이 전투를 훌륭히 치뤄낼 능력이 있으면서도 영리하다. 주인공 캐릭터의 매력이 극을 멋지게 이끌어가고 있다. 황자가 죽임을 당해야하는 이유 그리고 바르사가 무사로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이유, 그리고 황자의 주변 사람들 이야기가 갈등하며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정령의 수호자'는 과연 누구를 일컫는 말일까? 그리고 과연 황자의 몸 속에 깃든 존재는 사악한 존재인가, 선한 존재인가. 신요고국의 엄격한 황궁 분위기에 그 해답이 있다.
'슈발리에'의 가치관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정말 악인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 조차 실제 역사 속 인물인데 불구하고 정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그려졌다. 한가지 스토리 상의 힌트를 주자면 이번 애니 '정령의 수호자'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악인은 없다. 신요고 황국의 황제는 그 커다란 제국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살신성인의 마음가짐으로 노력하고 있고, 성도사나 천문박사 슈가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들 나라의 전설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도 있을 만큼 충분히 대단하고 거창하다. 인간은 원래 악하지 않으나 오해와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뿐이다.
'정령의 수호자'는 이런 전반적인 미스터리와 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주인공 황자, 타그무와 단창술사 바르사의 인간적인 유대도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자신의 업보를 끊고 싶어하는 바르사와 그의 야쿠 친구, 탄다, 바르사에게 도움을 받은 의남매 토야와 사야, 주술사 토로가이의 이야기가 하나의 가족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어른이자 보호자인 바르사도 인간으로서의 발전을 이루어 나가고 신성의 문제로 황궁을 탈출한 바리데기 왕자, 타그무 황자도 자신의 성장을 이루어나간다. 정령의 수호자 역시 원작 소설이 있는 까닭에 스토리는 정해져 있다(국내 출간).
개인적으로 2007년에 나온 애니 중에선 가장 수작이라고 생각하며 캐릭터, 설정, 음악, 화질을 비롯한 많은 부분에 감탄하고 있지만 역시 '가상의 공간'에 완벽히 적용된 일본식 풍습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는 동물들과 자연 환경까지 모두 다르지만 일본 애니에선 모두 일본 풍습을 따른다는 발상은 재미있는 일이다. 신요고 황국은 더군다나 중국 천자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일본색을 볼 수 없는 일본 애니는 몹시 드물다. 26에피소드 모두 평범하게 시청할 만하다. 엄격해 보이는 애니 속 풍경과는 정반대로 오프닝에서 사용하는 영어 가사의 음악은 L'Arc~en~Ciel(라르크엔시엘)이 부르고 있다. 감독은 공각기동대의 감독이라고 한다.